카테고리 없음2012. 9. 23. 01:31
영화 광해를 보고... 빌려온 글..
 
 
허균의 삶과 의의

- 류주환 /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허균은 명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문장 실력을 타고났고 일생 박학(博學)하고 문재(文才)가 걸출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비교적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길러졌고, 당시의 유교의 테두리를 넘어 불교와 도교까지 이어지는 폭넓은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탓에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 성향이 강하게 되어 서자들을 포함한 소외 계층도 동등하게 인정하는 성격이 길러졌다. 또한 집안은 허균에게 든든한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다. 그는 아깝게도 허균이 12세 때 객사했다. 아버지보다 오히려 더 튼튼한 정치적 배경이 되어 준 것은 21세 위의 배다른 형 허성이었다. 허성은 선조가 무척 아끼는 신하 중 하나였고 사위로 선조의 아들 의창군을 맞았다.

허균은 25세에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벼슬이나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17세에 결혼도 했다. 그러나 20세와 21세 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허균과 기질이 비슷했던 둘째 형 허봉과 누나 허난설헌의 죽음을 연이어 맞이했다. 그리고 24세 때에 맞은 임진왜란도 그에게 아픔을 주었는데 곧 피난 가던 중 부인이 아이를 낳고는 죽고 아이도 곧 죽는 불행을 당한 것이었다. 고향인 강릉에서 피난살이를 했고, 그곳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교산(蛟山)이라 했다.

그리고 26세에 선조조(朝) 조정에서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문장 실력과 영민함을 바탕으로 중국에 다녀오거나 중국 사신을 맞는 일 등 중국 관계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29세에는 재혼을 했다. 그는 기생과 놀아난다거나 불교를 숭상한다는 등의 이유로 여러 번 탄핵을 받아 파직되곤 했으나 계속하여 벼슬을 받았다. 33세 때는 공무(公務)로 전라도 부안에 갔다가 명기 계생(桂生) 즉 매창을 만나 사귄다. 이들은 육체적 관계없이 끝까지 우정을 나누었다. '여색을 밝히는' 성품이었던 그의 자유분방함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던 것이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을 하여 성품이 부박(浮薄)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나, 뛰어난 글 솜씨와 형 허성의 배경으로 인해 선조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선조가 죽을 때 허균은 공주목사로 있었다.

광해는 선조의 서자로서 선조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고, 그를 밀었던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1608년, 허균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허균은 서얼들을 가까이 한다는 등의 이유로 공주목사에서 파직을 당했으나 잠시 후 정3품 벼슬에 복귀했다. 그는 광해조에 들어와서도 중국 관계 일을 계속 맡았고 뛰어난 문재(文才)로 인해 광해의 눈에 들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다른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고 많은 탄핵이 이어졌다. 주로 '사람이 경망스럽다'는 이유였다. 허균이 유교가 확립된 사회에서 정통에 벗어나는 행동을 거리낌없이 행하였다는 반증이 된다.

광해 2년(1610, 42세) 가을에는 과거 부정 사건이 벌어진다. 이것은 한 과거에서 시험 관리들의 친척들이 대거 붙어서 의혹이 불거진 사건이었다. 더 심한 경우가 있었는데도 허균은 허성의 아들 허보와 사위를 붙여주었다는 혐의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다른 관리들의 경우는 왕의 외척 관계에 있어서 그 권세에 눌려 허균만 잡아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허균은 전라도 함열에서 약 1년 동안 유배를 당한다. 그는 거기에서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엮어내어 지금도 허균 사상을 알아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광해 4년(1612, 44세), 형 허성이 죽었고, 허균은 호남 지방을 두루 다녔으며 이때쯤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길동전"은 반드시 혁명적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태생이 아니라 그 재능의 유무를 기준으로 써야 한다는, 허균이 갖고 있던 일종의 평등 사상을 예시한, 시대를 뛰어넘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다.

그런데 허균의 삶에서 중요한 고비가 되는 칠서(七庶)의 난이 광해 5년(1613, 45세)에 발생한다. 이것은 유력한 집안의 일곱 서자들이 사회에 불만을 품고 모여 지내던 중 그 중 한 사람인 박응서가 은상(銀商)에게 살인강도를 저지른 것이 발각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곧 이이첨이 정치적 공작을 벌여 역모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것이 계축옥사이다. 그리고 이이첨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이며, 정통성 시비에 민감해 있던 광해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였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얽어 넣었다. 그 결과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영창대군,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을 대역죄로 몰아 결국 죽였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곧 광해의 나이 어린 계모) 또한 폐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이 소위 폐모론, 또는 당시 대론(大論)이라 불린 것인데, 허균이 죽던 1618년까지 특히 그것을 둘러싼 정쟁이 심했고, 광해가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할 때까지 골칫거리였다. 특히 이 폐모론은 허균에 있어서는 죽을 때까지 뗄래야 뗄 수 없는 악연이 되었다.

허균은 칠서들의 대다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거사를 할 때 사용될 격문(檄文)도 지어 주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러나 칠서들은 옥사 중에 허균을 입에 올리지 않아서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균으로서는 자칫하면 목숨이 달아날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일단 득세를 하고 있고 계축옥사를 일으켰으며 폐모론을 주도하고 있던 이이첨에게 가세하게 되었다. 득세를 하기 위해서는 정국을 주도해야 했고, 당시에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폐모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가는 것이었다. (영창대군도 죽이기를 원치 않았던 광해는 폐모 역시 끝까지 반대했기에 그가 반드시 폐모론을 원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허균은 적극적으로 폐모론을 주장했다.

이이첨 세력의 도움 때문이었는지, 허균은 그해 12월에 예조참의를 제수 받았다가 탄핵을 받아 바로 파직되었다가 바로 다음 달인 광해 6년(1614, 46세)에 호조참의가 된다. 이후로 허균은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허균이 중국 사신(천추사)이 되어 중국에 갔다가 몇몇 중국 서적들에 조선 왕조의 폄하, 광해군 비방 등의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허균은 그 사실을 알리고 문제의 책들을 구해왔다. 그리고는 이듬해에 다시 중국으로 가서 중국 조정이 그런 잘못을 바로 잡도록 만들고 돌아왔다. 이것은 항상 중국 관계에서 항상 고민하고 있던 광해에게는 아주 흡족한 일이었고, 그리하여 허균은 큰 환심을 사서 정2품 형조판서에까지 오른다(1616년 5월, 48세). 그런데 이 소위 '변무 사건'이 허균의 자작 사기극이었다는 의혹이 "광해군일기"에 제기되어 있다.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허균은 한 옥사가 일어났을 때 잘못 처신한 죄로 형조판서에서 파직이 되고 하급 관리직을 맡는다. 하지만 광해는 여전히 허균을 신임하고 있었다. 그때 흉격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광해 9년(1617) 1월 20일 새벽에 발생했다. 인목대비가 거처하고 있던 경운궁(서궁이라고도 함)에서 화살에 흉서가 붙어 있는 것, 즉 흉격(兇檄)이 발견된 것이다. 거기에는 광해가 서자로 왕에 오르고 아버지와 형(임해군을 지칭)을 죽였다는 강력한 비난과 함께, 영의정 기자헌을 강제로 자기들 뜻에 따르게 하고, 28일에 거사할 것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외면상으로 본다면, 당시 반정을 하려면 명분상 인목대비의 윤허가 필요했기 때문에 누군가 반역을 하기 위해 대비에게 연락을 취하려던 글이 발견된 것으로 보였다. 광해는 28일에 대궐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명하는 등 긴장을 보였다. 그런데 "광해군일기"에는 이 일은 당시 폐비론에 반대 입장이었던 기자헌을 제거하고 폐모론을 활발하게 일으키기 위해 이이첨과 허균이 꾸민 일이라고 주장한다. 곧, 흉격에 따르면 기자헌이 억지로라도 반역 일당에 따를 것이라고 쓰여있는 셈이기 때문에 기자헌을 얽어 넣고, 반역자들과 통하고 있다고 대비를 무함하고자 꾸민 일일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한 기자헌은 강원도로 피신해 버렸다. 그러면서 광해에게 글을 올려 허균이 범인이라고 암시를 했다. 그 흉격에 대해 허균과 유희분 등등 사이에 얘기가 돌았고 자칫하면 흉격의 범인으로 몰릴까 하여 서로서로 해명하는 상소들을 올렸다. 그런데 이 사건은 시간이 가면서 흐지부지 된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광해가 허균이 폐모론을 주장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고 사건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이이첨은 흉격 사건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정적이었던 유희분 및 박승종과 화해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왕실의 외척이었으며 세도가 대단했다. 3월에 같이 모여 시를 지으며 나라를 위해 화합을 맹세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던 것이었다. 10월에 허균은 형조판서로 복귀한다. 11월에는 대대적인 폐모론 상소들이 올라오는데, 이이첨과 허균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했다. 곧 사람들에게 폐모론이 성공하면 상을 주겠다고 하며 부추긴 것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12월에는 정2품 좌참찬(의정부의 고위 직책)이 되었다. 기자헌은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줄기찬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된다.

12월 24일과 26일에 기준격의 비밀 상소가 있었다. 기준격은 기자헌의 아들로서 허균보다 한참 연하였다. 기씨 집안과 허균의 집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것 같다. 기준격은 허균의 집에 왕래하며 허균에서 글을 배우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허균을 고발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그 동안 허균이 역모를 꾀해왔다는 것이었다. 의창군(허균의 조카 사위)을 왕으로 세우려고도 했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고, 칠서들과 가까워 격문을 지어주었고, 지금은 보신을 위해 이의첨에게 의탁해서 대비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등등의 주장이었다. 허균도 그에 대응하여 상소를 올렸다. 광해는 즉각 조사를 지시하지 않고 상소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는 몇 개월 후에야 상소들을 대신들에게 내려보냈다.

이듬해 광해 10년(1618) 1월 4일, 백관들이 잔뜩 모여 광해에게 폐모를 청하는 소위 '폐모 정청'이 열렸다. 그 동안 이이첨과 허균의 무리가 만들어온 작품이라 했다. 그러나 광해는 하늘에 대고 탄식을 하면서 거절했다.

허균은 자객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기자헌 일당의 소행인 듯하다는 상소를 올렸다(1/7). 그리고 며칠 후(1/12) 이이첨과 허균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를 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두 가지 일은 허균이 기준격에 의해 불리해진 상황을 만회해 보려 벌인 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대신들은 아직 기준격의 상소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내용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듯하다. 대신들은 기준격과 허균 중 하나는 대역죄인일 것이라 했다. 기자헌을 옹호하는 무리들도 있어 허균이 더욱 불리해졌다. 광해는 사건을 천천히 처리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다. 자신의 건강이 문제고, 담당대신이 임명되지 않은 것과, 고발의 내용이 10년 이상 된 일들이기 때문에 천천히 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폐모를 쉽게 허락할 듯도 한 광해가 폐모 정청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이첨은 선주(先奏)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즉 먼저 중국에 고해서 허락을 받은 후에 폐모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폐모론은 성사되어도 악명을 얻게끔 되어 있었고 그러면 광해의 은총도 잃을 가능성이 높았던 때문에 나온 이이첨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곧장 폐모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이첨과 허균의 갈등은 점점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이첨에게 있어서 허균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어갔다. 우선 이이첨과 허균이 최소한 한 때 같은 무리였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흉격 사건도 같이 벌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폐모론을 이끌기 위한 대대적인 상소 올리기 같은 것은 틀림없이 공조(共助)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준격의 상소로 허균이 반역죄인이 되면 자신과의 관계가 드러나서 같이 얽혀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허균은 점차 폐모론에서 이이첨과 노선을 달리해가고 있었다. 또 하나는 세자빈이 이이첨의 외손녀였는데 아들이 없어서 후궁을 뽑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허균의 딸이 간택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허균의 세력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했다고도 한다. 허균 무리와 이이첨 무리는 서로 반목하는 사건들이 하나 둘 발생하기 시작했다.

윤4월 6일의 진사 곽영의 상소는 허균에게 상당히 불리한 상황을 가져다주었다. 곽영은 상소에서 이이첨과 허균을 탄핵했다. 이이첨에 대해서는, 아무리 심해도 결국은, 세도와 불의를 저지른다는 그런 내용의 것들뿐이었는데, 허균에 대해서는 흉격 사건의 주범이고 칠서에게도 격문을 지어주었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곽영은 곧 국문을 받았고, 그는 소명국(蘇鳴國)에게서 들었다고 했고, 다시 소명국은 기준격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대신들은 광해에게 곽영의 상소에 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작년의 기준격의 비밀 상소를 봐야겠다고 광해에게 청을 했고, 광해는 드디어 그것을 들어줘서 상소들을 내려보냈다. 그것을 본 대신들은 그 내용에 놀라 기준격과 허균 둘 중에 하나는 대역죄인일 것이라며 조사하기를 청했다. 특히 반역 고발의 대상이 된 허균을 지목하여 대역죄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문을 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청을 광해는 여전히 건강 등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

5월 3일에는 기준격의 상소 내용과 대신들의 비난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허균의 긴 상소가 올라왔다. 기자헌의 집안과는 서로 원수가 되어 있다고 밝히며 그 내력을 상세히 설명하고, 기자헌 등의 고발 내용들이 모두 부당함을 상세히 논변했다. 대신들은 기준격, 기자헌, 허균 등을 하루 빨리 잡아들여 신문하기를 요청했지만 광해는 아직도 허락지 않았다. 어쩌면 이때까지는 광해는 지금까지의 기준격과 허균의 모역·모함 공방을 크게 문제삼고 싶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의창을 옹립하려 했다는 것은 실상 별 설득력이 없었고, 영창대군 옹립 및 그의 외조부인 김제남 등과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이 제거되었기에 지금으로서는 실효가 없는 얘기였고, 더구나 허균은 가장 강력한 폐모론의 선두주자였던 것이다.

이즈음은 북서쪽의 변방의 일로 시끄러웠다. 여진족의 누루하치가 강력해져 후금을 세우고 드디어 윤4월에 명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다급해진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고, 조선에서는 후금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고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곤란했다. 전쟁 준비가 계속되면서 무수한 전쟁 소문과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불안해져서 도성을 떠나 피난 가는 사람들이 속출해서 나라에서는 백성들을 무마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허균에 대한 기준격의 역모 고발도 별다른 언급 없이 두 달 이상이 흘러갔다. 그러다 드디어 허균의 최후로 이끈 남대문 흉방 사건 발생했다.

8월 10일, 남대문의 바깥쪽 문 위에 흉방이 붙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고, 그 소식을 들은 관원들이 달려가 떼어와서 폐기하려고 했다가 다른 관원이 아무래도 폐기하면 안될 것 같아서 가져다가 바쳤다. 그 내용은 지난 해 1월에 서궁에 던져진 흉격과 비슷했고, '조선'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끝에 '백성을 구하고 죄를 벌하러 하남(河南)대장군이 장차 이를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광해군을 비난하고 거사할 것임을 천명한 글이었다. 허균의 조카인 하인준이 대론 상소 건으로 궁궐에서 밤새 있다가 궐을 나가다가 그것을 보았다고 장령 한명욱에게 고했다. 그런데 하인준과 한명욱의 진술에서 서로 말한 시간이 합치하지 않아서 하인준에게 의심이 돌아갔다. 광해는 이 일을 신속히 처리할 것을 명했다.

우경방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대론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결사맹문이라는 것까지 지어 열심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는 임금의 도장을 위조했다는 죄목으로 잡혀있었다. 그런데 허균은 그가 대론을 성사시키기 위해 소장을 올리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를 놓아주라는 편지를 보낸다. 허균은 아직 잡혀 들어가기 전이니 여전히 재상의 몸이었다. 그런데 광해는 16일 대신들에게 기준격과 허균 등의 상소를 내려보내 처리를 의논케 했고 그 결과 17일 기준격과 허균이 잡혀 의금부에 수감된다. 어쩌면 광해는 남대문 흉방 사건의 배후에 허균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허균의 무리인 하인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짐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광해는 흉방 사건을 보고 어떤 위기를 느껴 허균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허균이 잡히던 날 몇 사람이 소란을 피웠다. 옥을 깨고 허균을 구하겠다고 소리지른 소동이었다. 다음 날인 18일 허균과 기준격은 정국을 당한다. 그들의 주장은 이전의 상소 내용들과 같았다. 허균은 삭탈관직되고 허균의 딸이 동궁의 후궁 간택 가능성도 무산되었다. 허균의 처첩의 집에서 문서를 수색해 왔다. 전에 흉격을 처음 발견한 김윤황(흉격 발견 당시 겸사복(兼司僕)이란 직책이었음; 허균의 일당으로 알려짐)과 현응민(허균의 외가쪽 서자), 우경방(훈련원 정), 하인준(허균의 조카), 이사성(허균의 사위), 추섬(허균의 첩), 민인길(허균의 먼 친족, 흉격 사건에 관련), 김개(종2품 관리. 허균이 하옥되던 날 형구를 풀어주었다 함), 원종(관리. 허균과 친밀했고, 허균이 잡히던 날 허균을 구하겠다고 소란을 피움), 등등의 많은 사람들이 잡혀온다. 이들은 역모죄에 말리지 않으려고 허균과 별 관계가 없다는 등의 진술을 한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이 들어가자 김윤황과 하인준(23일), 그리고 추섬(24일)이 죄를 인정했다. 김윤황은 흉격 사건이 허균이 시켜 자기가 한 일이라고 자백했고, 하인준은 남대문 흉방 사건이 허균이 저지른 것이라는 취지의 자백을 했다. 그리고 추섬은 허균이 3년 전부터 역모를 꾸며왔다고 진술했다. 국청에서는 김윤황과 하인준의 자백으로 허균을 사형시키기를 청했고, 광해는 허균 등으로부터 더 자세한 정상을 알아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 하루빨리 역적을 제거해야 백성들이 납득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광해를 협박하다시피 하여 드디어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1618년 8월 24일의 일로서, 이날 허균, 하인준, 현응민, 우경방, 그리고 김윤황을 공개 처형했다. 하인준은 흉방에, 김윤황은 흉격에 동참한 죄였고, 현응민은 허균의 수족으로 활약했다는 죄였다. 우경방은 사람들과 결사맹문을 지어 죽음을 각오한 교유를 맺은 것과 허균의 지휘를 받았다는 죄였다.

그런데 허균은 자신의 사형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형을 시키려면 결안(決案)이란 것을 받아야 하고 거기에는 죄인의 자백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자백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이첨 측이 허균에게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말이 나올까봐 곧 살아날 거라고 안심을 시켰다고도 한다. 사형 당하려 끌려갈 때 비로소 친국하던 광해를 향해 '할 말이 있다'고 외쳤으나 대신들이 모른 체하여 광해도 그냥 사형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허균은 사형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며, 주로 하인준과 김윤황의 자백 내용을 근거로 처형이 되었다. 기준격의 고발 내용에 대한 조사는 행해지지 않아서 그 진위여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허균의 사후에도 대규모의 옥사가 이어졌다. 광해군일기에는 대개 3개월까지 기록에 나오고, 8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는 말도 있다. 허균의 가족, 친지, 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가 조사와 고문을 받았다. 고문에 못 이겨 죽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한편 허균을 고발했던 기준격은 역모를 늦게 고발했다 하여 장배(杖配) 3년에 처해졌다.

과연 허균이 남대문 흉방 사건의 주모자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아니라면 진실은 무엇일까?

허균의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벼슬이 높은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허균이 형조판서(정2품)였고, 김개는 한성부 좌윤(종2품)이었으며 김우성은 공조좌랑(정6품)이었다. 김개와 김우성은 고문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외에 수 명이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미관말직, 유생, 서얼, 상민, 종 등이었다. 허균이 갇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허균을 구하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허균이 처형되었을 때 그의 목을 가져가려다 잡힌 사람도 있었다. 우경방과 함께 대론을 성사시키자고 결사의 맹세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허균을 추종하고 허균과 뜻을 같이 한 사람들도 많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가능한 허균의 반역 모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거사에는 승군과 무사 수백 명을 주축으로 한다. 추대는 의창군(선조의 아들, 허균의 조카사위) 또는 허균으로 한다. 제거할 인물(이이첨 등)과 이용해야할 인물 등을 모두 미리 정해놓는다.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유생들이 조정의 여론을 동요시키고, 무관들은 군사를 동요시키고, 그리고 일반 민심을 동요시킨다. 밤마다 산에 올라가 전쟁이 가까웠고 유구(류큐, 琉球: 남만족)의 군사들이 쳐들어와 섬에 숨어있다고 외친다. 거기에 '하남대장군이 일어난다'는 격문을 돌린다. 평안도, 황해도의 군사들과 전라도 나주의 군사도 동원한다. 우선 폐모론을 내세워 서궁을 치는 척 하다가 혁명을 한다.

반면에 반역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우선 혁명 계획치고는 좀 엉성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 동원이 확실해야 하는데, 확실한 군사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무사와 승군이 언급되지만, 구체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만한 무사들과 스님들의 집단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승군의 경우도, 물론 스님들이 임진왜란 때의 활약에 비하면 여전히 천대받고 있었기에 불만 세력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겠지만, 어디의 어떤 승군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반란 초기에 조정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하는데, 동조하려했다는 대신들이 거의 없었고, 숙청 대상도 이이첨 외에 한두 명 정도의 언급만 있을 뿐이었다.

기준격의 상소 이후 대역죄인으로 지목되어가던 허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허균은 즉시 기준격의 상소의 대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윤4월 6일의 곽영의 상소 때문에 대신들이 비로소 기준격의 상소를 보고 떠들기 시작하자 5월 3일에 다시 상소를 올려 자기 변명을 아주 상세히 하고 있다. 자칫하면 대역죄인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는 중대사였기 때문이다. 허균은 자신의 상소에서 변론하였듯이 옥사를 당했을 때도 기준격의 고발에 대해서는 변론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8/22 하인준 공초 참조). 반면에 흉격이나 흉방은 모두 작자가 밝혀지면 그것을 쓴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대역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모두 광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운궁 흉격 사건은 허균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그때 김윤황이 발견자였고, 뒤이어 나온 여러 사람들의 공방 때도 허균과 주변 인물들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렸다. 광해군일기는 폐모론을 일으키기 위해 이이첨이 허균을 사주한 것이며, 광해가 그 사실을 알고 없던 일로 덮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허균 반역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윤황이 흉격을 던진 일만 자백했을 뿐 그 구체적인 배경이나 흉격의 내용, 거사 계획 등에 대해서는, 광해마저도 알고 싶어했지만, 결국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허균과 김윤황은 그저 흉격을 지었다는 자백 하나 만으로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죽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균의 소행이었다면 역시, 밝혀질 경우에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폐모론을 다시 활발하게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로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유력하다.

반면에 남대문 흉방 사건은 허균의 소행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우선 하인준은 최초 목격자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흉방을 여러 사람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봐서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한명욱의 집에 가서 얘기할 때도 그 집에 와있던 손님들도 이미 보았다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흉방에 관한 확실한 진술은 하인준의 자백(8/23)에 나오는데,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1월에 있었던 익명 언서(諺書)[이것은 광해에 대한 비방은 없고 다만 대론을 주장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글이었다]에 대한 것만 자세히 언급할 뿐이고 흉방에 대해서는 단지 '대개 흉서는 허균이 만든 것'(大 [개=槪와 同字]兇書許均爲之)이라는 식의 추측성 발언만 하고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하인준의 다른 진술(8/22)에는 그가 흉방을 보았던 날(10일) 허균에게 말했더니 허균이 '우리들에게는 다행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허균의 소행이 아니라고 해석이 된다. 어쩌면 허균은 흉방 때문에 사람들 관심이 그리로 갈 거라고 생각했거나, 방을 누가 붙였건 간에 민심이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허균에게는 확실히 압력이 덜 가해졌을 것이다. 만일 허균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흉방 사건을 보고는 별 대책없이 방심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거사를 준비하고 있는 무리(허균 일당)에서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서 정감록의 정도령이 출현한다는 식으로 '하남 대장군 정 아무개가 온다'라고 써 붙였다. 그렇다면 당장 거사할 것이 아니라면, 주모자의 한 사람(하인준)이 일부러 나서서 그런 방을 봤다고 떠들어 의심을 살 필요가 있었을까. 계속 기회 있을 때마다 격문을 돌리고 방을 붙여서 소문이 돌고 민심이 소란스럽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누군가 그 방을 붙이다가 발각될 경우를 대비하여 방 붙이는 사람은 최소한 거사 무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고 설혹 잡힌다 해도 아무리 혹독한 고문에도 누설하지 않을 사람을 시키지 않을까. 한편 허균이 맥없이 잡혀 들어간 것만 해도 거사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의심케 만든다. 물론 김개가 형구를 풀어주고 원종이 소란을 피웠지만 이 둘은 모두 허균과 절친한 관계에 있던 높은 직의 관리들이었고, 무력 행동을 계획하며 무사들을 동원하려 했다던 무리의 괴수가 잡힌 것치고는 오히려 소동이 없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실상이야 어떠했든 허균은, 이이첨 등의 제거 필요성과 광해의 처형 결심이 맞물려서, 흉격 사건과 흉방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서 급히 처형되고 말았다. 허균에게 향해졌던 다른 많은 혐의는 엄밀히 보아 일방적인 주장들이었을 뿐 그 사실들이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허균은 최대 역성 혁명을 모의한 자에서 최소 흉격의 주범 중 어느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허균의 말년의 모습으로 확실한 것은 그가 폐모론을 적극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이첨의 무리인 대북파에 몸을 의탁했고, 또 그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과정에서 폐모론을 정치적 수단으로 십분 활용했다. 그는 확실히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허균은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당시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이익에 따라 -그 '이익'이 무엇이었건 간에- 적극적으로 권력 투쟁을 벌이다 제거된 모습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폐모론에 대한 허균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폐모론은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내건 광해의 잘못 중 첫 번째로 손꼽힌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폐모론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던 허균은 조선왕조의 정통적 관점에서 광해 이상의 비도덕적 인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지 몰라도 광해가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이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허균은 어떤 논리에서 폐모론을 주장했을까. 그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술은 아마 광해 9년 11월 25일 허균이 의정부에서 한 발언일 것이다. 이때 많은 대신들이 폐모론에 관한 의견을 개진했는데, 당시 형조판서에서 파직되어 하급 무사관직(종5품)을 맡고 있던 허균도 뒷부분에 한 마디를 한 것이다.

    "우리 임금을 해치려 한 자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그런 원수에게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통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끝까지 은혜를 온전히 하려는 것은 전하의 심정이고 대의를 내세워 폄삭을 가하려 하는 것은 신하들의 책임입니다. 재야에서 올린 여러 상소는 그 견해가 매우 정당하니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곧 광해의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대비가 임금을 해치려 했기에 그냥 둘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허균은 유생들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상소를 올리는데 적극적이었다. 여기까지는 문재(文才)가 뛰어난 허균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문제에 접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허균은 실록이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듯이 무력으로라도 대비를 제거하려 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실로 무덤을 파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비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인륜을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 때문에 폐모론이 신하들 사이에서도 확실한 공론으로 정해지지 못해 질질 끌었고, 광해가 그 많은 안팎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폐비를 무력으로 죽인다면 그 당장도 물론이지만 그 이후 두고두고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결국 광해의 웃어른이었던 대비를 몰아내서 조금이라도 화근을 없애서 광해가 정통을 이어가는 것을 확고히 하는 가장 타당한 방법은 공론을 하루빨리 확정지어 대비를 내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임금을 해하려 했다면 그 누구라도 죄인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계축일기"에는 계축옥사 후에 인목대비가 처소에 유폐되고 불이 나는 등 위험을 당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 허균의 이름이 한번쯤 나옴직도 하지만, 이이첨의 이름은 나오는 반면 허균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허균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것은, 일견 허균의 말년의 모습이 그 앞의 생애와 상당히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그에 대한 이해에 혼란을 주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선 허균의 인간성을 생각해 보자. 허균은 확실히 당시 유교적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에게는 '행실이 경박하고 음란했다'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그가 불교와 도교를 가까이 한 것이 사대부들의 비위를 근본적으로 상하게 했음이 확실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행동들도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특히 그는 색(色)을 가까이 했고, 그래서 기생들과 놀아났다는 탄핵을 여러 번 받았다. 그가 또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 같고,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전연 없었으며,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喪禮)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실록 9/6)고 했는데, 그중 성리학적 규범에 맞지 않는 불교 도교 등의 측면 외에는 이런 수식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별로 없다. 물론 허균은 천성에 따르기를 주장했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비난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생각할 점은 허균이 변무 사건을 조작했는가 하는 점이다. 심한 경우엔 그런 책을 스스로 지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중국에 실제 그런 서적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가능성은 더 높다. 그래서, 그것이 별 문제될 수준은 아니었는데, 최소한 허균이 사건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때 허균은 과연 공금을 횡령했을까? 그는 그때 중국에서 수천 권의 책을 사 가지고 왔다. 전후 사정을 미루어 판단해 보면 그 많은 책을 구하느라 공금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가서 직접 또는 중국에서 온 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조선의 사신들에게 혹시 그가 비난을 받았던 일들은 당시 관행 정도의 일이었던 것은 아닐까.

허균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허균을 인격적 결함 투성이고 권력을 잡으려 혈안이 되었던 모습으로 그린 왕조실록이나 그 유사한 유학자들의 기록들에서 물러서서 허균의 작품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에 나온 시들과 글들을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보면, 좀더 자신에 충실하려 했고 인간 차별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허균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확실히 그에게는 서자들로 대표할 수 있는, 소외 계층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자기 신념에 투철했고 이상사회를 동경했던 개혁가, 혁명가, 그리고 선구자로서 그를 평가하고 있다.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삼인출판사, 1998)의 저자 김재영씨는 '어찌보면 허균은 현실에서는 그저 평범한 관료, 정치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서자들의 대변자도, 고통받는 백성들의 존경받는 관료도 되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참고: 이 책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허균을 서자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허균은 서자가 아니다.) 이 말이 허균이 결국 정치 투쟁에서 밀려나서 역적으로 처형되었다는 결과만을 반영한 말이라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평가는 그렇게 피상적으로 섣불리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허균이 외직(삼척부사, 공주부사 등)에 있을 때 불사를 행하고 창기들과 놀아난다는 등의 탄핵으로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그 진실과 정도가 어땠는지, 백성들은 또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각 고을에 그런 것이 있었다 해도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니 모두 파기되고 묻혀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정치 무대에서의 한 벼슬아치가 존경을 받는 것은, 학문의 깊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가짐, 충절 등의 덕목에서 비롯될 것이다. 허균에 대해 우선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맨 먼저 과거 부정이 떠오른다. 허균은 과거에서 여러 차례 부정을 저질렀다고 폄하되고 있다. 최소한, 한 번은 그 이유로 되어 죄를 받아 귀양까지 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상을 알아보면, 그때 시험관리들의 친척들이 다수 붙었기에 문제가 되었는데, 다른 세력가들이 경우가 더 심했지만, 피라미격인 허균이 대표로 희생된 것이었다. 허균의 조카와 형의 사위가 붙었는데, 그들이 급제할 실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언급도 안되었다. 광해군일기에는 허균이 과거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들 외에 몇 명 더 언급되어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몇몇 경우에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급제시키기 위해 허균이 노력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그에 비하면 당시 득세하고 있던 다른 무리들 사이에서의 과거 부정은 극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허균이 최소한 재물을 탐하였다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중국 사신으로 가서 공금을 횡령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했다. 최소한 이 경우도 개인적인 재물을 탐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뚜렷한 주관이 있었다. 물론 성소부부고가 43세에 엮어졌고 44세 경에 홍길동전이 쓰여졌을 거라고 추측되니, 그의 사상, 정치관, 문학 등이 직접 표현된 글들은 대개 그때쯤까지이고, 그 이후에는 가장 말년에 지은 상소문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생애 말기 약 5년 정도의 허균의 생각은 직접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은 있다. 과연 말년의 허균은 자신의 글에 그려진 내면의 모습마저 저버리고 오직 권력에 눈이 멀어 사투를 벌인 탐욕의 정치가였을까. 혹시 그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이 아주 커서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웅대한 뜻을 가슴에 품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만일 전자라고 한다면 사람이 몇 년 사이에 그렇게나 변할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이고, 만일 후자라고 한다면, 그 권력을 광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계획했건, 스스로 왕이 되어 스스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계획했건, 내용적으로는 가히 혁명을 꿈꾼 것이나 진배없었다고 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허균은 세상 영예의 헛됨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시와 글들, 그리고 42세에 편찬한 한정록에 보면 그는 때가 되면 속세를 떠나 청빈하게 살고자 원했다. 천성이 거리낌없고 만물에 통달한 천재였던 그가 쓴 글들을 읽어보면 진솔하게 나라를 근심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평생 시(詩)와 문(文)을 중시하고 소외 계층들을 동정한 그가 백성들에게 해악을 직접 끼칠 일을 행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물론 중앙정치 무대에서의 허균은 자신의 뜻을 펼쳐볼 기회는 없었기에 안타깝게도 드러나는 업적을 행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의 꿈처럼 열심히 뜻을 펼치다 어느 날 홀연히 훌훌 속세를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중도에 좌절된 것은 아니었을까.

허균을 단순하게 시대를 앞서 개혁을 꿈꾼 인물로 보거나 철저한 기회주의자로 보거나 모두 반대 의견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전적으로 순수한 의지의 선구자로 포장하거나 전적으로 패려한 인물로 낙인찍는다면 모두 허상일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오늘 날 우리에게 있어서 그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과거의 그가 현재의 우리에게 하나의 커다란 화두(話頭)를 끊임없이 던져준다는 것이다. 허균이 고요하나 커다란 음성으로 던지는 그 화두는 바로 '시대를 앞서 살아감'이다. 그래서 허균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출처-http://kenji.cnu.ac.kr/gyosan/life/life2.htm

Posted by 패치아담스
카테고리 없음2012. 6. 3. 01:45

자연에서는 힘센 고래가 기초 플랑크톤으로 생존하는 것이 법칙이다. 선진국은 그동안 개도국의 비용으로 무역과 금융을 지배했다. 그런데 선진국과 개도국 경제의 처지가 바뀌고 있다. 세계 화폐시스템도 이런 사냥군과 먹잇감의 지위 변화에 따라 변모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불균형에 따라 막강한 선진국 경제가 최근에는 방대한 외환보유액의 소유물로 전락하는 실정이며, 금융 위기 발생에 이어 국가 채무 위기가 지속되면서 세계 화폐시스템은 항상 저렴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하던 시절이 지나 더이상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기 힘든 변곡점에 도달했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인 핌코(PIMCO)의 창업자이자 공동수석투자전략가인 빌 그로스(Bill Gross)는 15일자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을 통해, 선진국 국채의 신용의 질 저하와 동시에 마어니스 실질 수익률을 감안할 때 글로벌 화폐시스템(Global Monetary System)의 큰 변화가 불가피하며, 이미 가시권에 들어온 것 같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 화폐시스템은 금과 은 본위제와 같은 실물화폐와 은행권과 같은 종이화폐, 즉 명목화폐 제도가 존재했다. 1944년 브레틍우즈에서 금 본위제를 폐지한 뒤에 선진국들은 달러 태환성과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하이브리드 체제를 열었다 이후 1960년대 말 미국 재정적자와 달러 발행이 막대하게 증가하자 금 태환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요국(G7) 중앙은행의 화폐발행 최소화와 2% 물가안정목표 유지와 같은 '좋은 행동'에 기초하는, 달러화를 여전히 기축통화로 하는 좀 더 느슨한 명목 화폐시스템이 고안됐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기축 통화(基軸通貨)는 과 더불어 국제간 결제나 금융거래에서 통용되는 통화를 가리킨다. 키 커렌시(key currency)라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달러가 이러한 기축 통화다. 그러나 이 나라의 통화의 신인도가 하락함에 따라 세계경제에서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1979년 당시 폴 볼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강경한 태도를 통해 금융시장과 경제는 이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했고, 세계 신용시장은 방대한 적자라는 플랭크톤을 먹고 고래처럼 자라났다. 이런 시스템은 최근까지 아무런 무리 없이 작동하는 듯 했고 25년간 지속된 '대 완화(Great Moderation)'의 시절이 도래했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한 뒤부터 이 화폐시스템은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무려 200조 달러에 달하는 금융자산 가치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정과 통화정책이 동원되었고, 이로 인해 핵심자산인 국채의 수익률이 하락하면서 위험은 높아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

최상위 등급 국가의 재정적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재정 조달은 점차 민간 신용시장에서 중앙은행에 의존하는 식으로 변화됐다. 이에 따라 몇 조 달러에 달하는 양적완화 정책과 장기 자금시장 공개조작이 공공연하게 집행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채 수익률과 미래 투자수익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로스는 "플러스 실질수익률의 따뜻한 태평양이 아니라 2% 물가 안정 목표와 비교할 때 마이너스 수익률의 차가운 극지방해가 펼쳐지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로스는 신용의 질이 낮아지고 수익률도 낮아지는 현실은 지난 40년 동안 유지되어 온 세계 화폐시스템의 붕괴 가능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채 신용등급이 최상위에서 떨어진 상황에서 단기 재무증권에 투자하려면 무려 200bp의 정책금리를 물어내야 하는 상황은 채권자들이 더이상 현존하는 시스템을 지지할 의욕을 잃게 할 것이라고 봤다.

그로스는 과거에도 모든 화폐시스템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싸움 속에서 주로은 채권국에 의해 새로운 체제로 이행 규칙이 만들어지곤 했다는 점을 상기했다.

지금 달러화 보유액은 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브라질 외에 몇몇 경상 흑자국가들이 지니고 있는데, 마이너스 2% 수익률은 더이상 선진국 국채를 매수하고 보유하는 보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화폐시스템의 변화가 복잡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데, 그로스는 지금처럼 완전히 명목화폐 형태가 아니라 좀 더 경화(hard money)에 무게가 실릴 것이고, 달러화가 여전히 가장 중심이기는 하겠으나 그 중심성이 완화된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로스는 세계 금융시장이 유로존의 통화 및 재정정잭의 일상적인 변화나 전개에 사로잡히면서 '리스크 온/오프'를 번갈아 나타내고 있지만, 유로존은 실은 국지적인 종양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짜 암은 부채 위기와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으로 발생한 신용의 질 저하와 수익률 하락에 의한 신용시장 악성종양과 세계 화폐시스템의 결함"이라고 강조했다.

Posted by 패치아담스
카테고리 없음2012. 6. 3. 01:36

Jul 5, 2008
Ron Paul, Alex Jones, John Birch Society, Belmont Brotherhood, John F. McManus


WHO IS "ALTERNATIVE MEDIA SUPERSTAR" ALEX JONES??!!

Alex Jones is the buddy of Jesuit-trained Knight of Malta Pat Buchanan, who participated (& no doubt still does) in Project Mockingbird, which was (& no doubt still is) a media-projected psyops/mindwars programme. This is on Jones' own website Infowars, mocking you.

See it for yourself at:
Operation Mockingbird: CIA Media Manipulation.

Why would he put it there? it's called "mocking the victim". Just like when he was allowed to "infiltrate" Bohemian Grove & then spread disinfo about the owl being a symbol of Moloch/Molech. Maybe their is some Moloch-worshipping going on, but the owl is a symbol of Lillith, not Moloch. Alex Jones fans are literally being laughed at by the Jesuits, Knights of Malta (SMOM), the top Masons & the CIA.

"대안 매체 슈퍼 스타" 알렉스 존스 는 누구인가??!!

알렉스 존스는 예수회로 부터 훈련받은 말타의 기사단 팻 뷰캐낸의 친구이며 매체 계획된 심리작전/정신 전쟁 프로그램인 흉내지빠귀 계획에 참가했고 지금도 참가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래 링크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Operation Mockingbird: CIA Media Manipulation.

왜 그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그런기사를 넣었을까? 그건 바로 "피해자를 조롱"를 하기 위함이다.
그가 보헤미안 그로브를 "침투"한 다음 부엉이가 몰락/몰렉의 심볼이라는 거짓정보를 퍼트렸을때 처럼 말이다. 아마 그곳에서 몰락을 숭배하는 행위가 있을지 모르지만 부엉이는 릴리쓰에 심볼이지 몰락의 심볼이 아니다. 알렉스 존스의 팬들은 글자그대로 예수회, 말타의 기사단, 높은 메이슨들과 씨아이에이로 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Posted by 패치아담스
하나님2012. 6. 3. 01:21

 

Posted by 패치아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