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2010. 10. 20. 18:28

예장 합동측의 몇 목사들이 신천지가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기에 좀 알아봤습니다.


양심선언한 목사인 정재영 목사(예장 기독개혁 찬양노회),
전신연 대표회장 서현주 목사(예장합동 청교도총회 광주노회)

에 대하여 예장 합동측에 전화를 해서 확인 해 본 결과!
 
예장합동측에는 이런 노회가 없다고 합니다. (tel 02-559-5600)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측의 86개 노회중 저런 노회는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http://www.gapck.org/  홈페이지에서 직접확인해 보세요~!

http://www.gapck.org/sub_05/sub01_01.asp (노회검색)




뭡니까? 이게~


http://www.yejang.tv/ (홈페이지 하단의 베스트 방송에서 신천지 대책을 시청요망)



신천지 "이단 아닌 진리의 성읍" 목회자 양심선언 논란 (내용보기)


Posted by 패치아담스
카테고리 없음2009. 4. 28. 21:46



한국의 지성 이어령교수...

그분의 간증을 들었다..

6살 어머니를 잃고,  대낮에 논두렁을 가로질러 굴렁쇠를 굴리다 먹먹하게 엄습한 무엇으로 인해

한줄기 눈물을 흘리셨다는 그분의 기억..


들으면서 내내..
마치 내기억과 같이 다가온다.



두갈래길..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이다.

우리는 두갈래 길에 서있다.   6살 어린 소년은 두갈래 길에 서있었던거 같다.

76세가 된 지금 다른 갈래에 길에 들어서신것이다.


이삶을 부정하며, 허무와 무의미로 이 삶을 살관하며,, 소비할것인가?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거듭난 새 삶을 살 것인가?


일상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가지고 바라보라는 당부를 남기시면서..  젊음의 탄생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삶이 새롭게 탄생될 것이라는 은유임을 알게 되었다. 






Posted by 패치아담스

 이동휘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다시 읽을겸 적어본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나를 먹으라.."  (요 6:35, 50, 51, 53, 55)

슬픈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되기 위해 뻣뻣해지신 예수님의 손..

죄인을 병든 자로 보시는 긍휼때문에..
 
안식일도 범하고 율법도 무시하는 파렴치한 망나니 취급 당하신 예수님의 명예..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술꾼으로 치부 당하시는 수모를 겪을지라도 밑바닥 인생을 끌어 안고자 하시는 예수님..

주님은 세상의 체면이나 지위를 모두 박탈 당하셨다.


최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셧을 때에.. 그 몸은 짓이겨진 시신으로 내어 주셨고,

걸쳤던 의복까지 모두 빼앗기셨다.  단 하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천국은 가득차고, 지옥은 텅텅 비어라.." 중에서...


이동휘 목사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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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패치아담스
 
이 시대엔 진정으로 존경하고, 흠모할 만한 어른이 많지 않은것 같다. 젊은이들이 롤모델로 삼고, 마음속에 닮기원하는 인물이 부족한 시대이다.

BUT..  난 참 복받은 것이.. 가까운 곳에 존경할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이동휘 목사님'은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오신 산 증인이시다.

 23년간 불편한 삶을 살며, 교회 재정의 70%를 선교에 사용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교회 운영과 자가용 조차없이, 최소 생계비보다도 못한 봉급을 받으시는 청빈한 삶과 설교가 말이나닌 삶으로 살아내시는 그분의 성품은 혹자가 말하듯이 이시대에 몇 없는 성자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깡통교회란 말도 교회당을 짓는데, 돈을 사용하지 않고, 깡통으로된 특이한 가건물을 교회당으로 수리하며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최근엔 PD수첩에 투명한 교회재정운영과 구제활동으로 소개가 된적도 있다.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같이 소개되지 않았던 것은 참 유감이지만..

3년전 이동휘 목사님은 정년퇴임으로, 안디옥 교회를 떠나셨다.

그러나 지난 3년간 그분을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더욱 더 자주 생각이 나고,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 안디옥 교회를 다니는 성도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늘 주일 낮 설교를 이동휘 목사님이 하셨다...

다시금 불편하게 삽시다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의 마음과  저 넓은 세계 가운데 수많은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교회사진과 기사 <-클릭





네이버에서 퍼온 우리 깡통교회(전주 안디옥 교회)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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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패치아담스
카테고리 없음2009. 3. 21. 00:22


우리 세대가 갖는 보편적인 상식은..
 
편안함은 좋은것이고, 안락한 인생 흔히말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정규직의 좋은 직장, 좋은차,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언제든 쓸수 있는 두둑한 자산등... 은 좋은것이다.
복받은 인생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그런  엄친아들의 삶..
물론 맞는 말이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고통스런 삶의 현실과 안락함과는 반대되는 고난과 가난,
불안한 삶의 상황은 나쁜것인가?
비정규직 인생에 먹고 죽을래도 없는 가난과 실연, 불성실하고 의리없는 거지같은 친구들..
그야말로 요즘 사고방식으로 보면,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저주가 곧 축복이고, 축복은 알고보니 저주일지도 모른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돼지우리 속에 돼지새끼들은 배불리 먹을 사료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에겐 고난의 자리가 필요하다. 광야가 필요하단 말이다.

안락함과 편안함을 박탈당해야만 될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당한 박탈이 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 기회의 박탈이 아닐까?



"고아가 세계를 지배한다." 라는 보고서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고난은 저주, 편함은 축복" 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여기엔 한가지 조건이 붙는다.

저항정신이다.

아무리 밟혀도 끝내 일어서는 그 끈질기고 집요한 저항 정신!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정신만 있으면 성공할 수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고난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보다  더 빛나는 삶을 살게 해줄

엄청난 창의성을 주는 필연적인 과정이라면, 우리가 겪는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수 있을까?


그리고...  고아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여기서 고아란 사춘기 이전에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가 없는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산 사람을 말한다.

톨스토이, 카뮈, 루소, 시저, 루즈벨트, 루이14세, 공자, 사르트르, 파스칼, 나폴레옹, 뉴턴, 폴투르니에....

무언가를 남긴 인생을 산 모든 이들은 저항 하는 인생을 살았다.



"공자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루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데카르트는 한 살 때, 파스칼은 세 살 때 각기 어머니를 잃었다고 합니다. 창조적인 예술가들 가운데 고아의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였고 바흐는 고아였습니다.
루소, 사르트르, 몰리에르, 라신, 스탕달, 보들레르, 카뮈, 조르주 상드, 키플링, 에드가 엘런 포우, 단테, 알렉상드르 뒤마, 톨스토이, 볼테르, 바이런,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등도 모두 고아였답니다. 이들은 상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




밟혀 봐야 일어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상실과 고통을 통한 깊어짐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생산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Posted by 패치아담스
하나님2008. 9. 30. 06:50

1. 위로의 말씀

왕상 19:9-10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인데 대하여 왕후 이세벨이 바알을 죽이려 하자 도망와서 굴 속에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그 곤고에 대한 위로의 말씀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물음에 에세벨의 복수를 피하여 숨어있다는 변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과 믿음에 특별히 최선을 다 하였는데도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 같은 것이라도 ---

 

2. 독려의 말씀

왕상 19:13-14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할터인데 어찌 굴 속에만 숨어있으려느냐 하는 채근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오직 혼자 남은 나까지 죽음으로 내 보내시겠습니까  지금 나갔다가는 당장 잡혀 죽을터인데요 하고 하소연 하는 것이겠지요,

 

3. 사명을 받음

※ 하나님의 채근은 곧 다음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라 볼 수가 있습니다.

왕상 19:15-16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4.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은 칠천인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시기와 때에 맞는 말씀의 공급하심.. ㅜㅜ  주님~  감사합니다....
Posted by 패치아담스
하나님2008. 9. 26. 18:30

  


 국민일보 2002.10.11, 15:07
[‘예수는 신화다’를 반박한다] “예수는 있는 그대로의 검증된 역사”

디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의 공저이며 1999년 영국에서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는 논쟁적인 책을 공신력이 있는 동아일보사가 번역하여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판매에 열을 올리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관련기사
  • [허호익 박사 인터뷰] “철저히 성서에 기초한 신학 신앙의 문화적 특성 재정립”

  • 이 책의 내용은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검증된 내용이 아니라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3세기의 영지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현저하게 왜곡하여 기독교 신앙을 호도하는 것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역사적 생애는 오시리스 신화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생애와 고대 이집트의 신화적인 인물 오시리스(Osiris)의 생애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이유로 예수를 오시리스와 같은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형태적 유사성만 부각하여 본질적인 상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궤변이다. 물과 기름이 액체로서 유사하다 하여 둘이 같다고 하는 논리를 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의 극치는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왜곡하려는 의도와 오시리스 신화의 본질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신 누트(Nut)의 아들로 누이동생 이시스(Isis)와 결혼하였는데 후에 형의 지위를 노린 아우 세트(Seth)에게 살해되고 그의 시신은 14조각으로 토막나 온 나라에 흩어져버린다. 이시스는 그 시체 조각을 다시 찾아 맞추어 최초의 미라를 만들고 그의 성기(性器)를 살려내어 관계하여 아들 호루스(Horus)를 낳았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소생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 결과 그가 소생하여 죽은 자들의 사후 세계의 왕이 되고 호루스는 산 자들을 통치하는 현세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문화와 결합되어 해마다 춘분이 되면 겨울에 죽었던 식물들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시키는 재생의식으로 지켜졌다.

    종교학자 R 내시는 오시리스 재생 신화와 예수의 부활 신앙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①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점 ②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는 점 ③단 한번의 죽음이지 반복된 죽음이 아니라는 점 ④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처형당해 죽는다는 점 ⑤자발적인 죽음이었다는 점 ⑥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다는 점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1세기의 유대땅 나사렛 사람 예수와 기원전 4500년께의 이집트의 신화적 인물 오시리스를 동일한 신화적인 인물로 여기는 것은 복음서와 고대 역사가들의 예수에 대한 기록과 오시리스의 신화를 이중 왜곡하는 것이므로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화적 인물인 예수를 3세기의 기독교가 역사적 인물로 각색한 것이 아니다

    바울마저도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로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공인되자 3세기의 유세비우스라는 역사가를 시켜 오시리스 신앙의 신화적인 인물인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각색한 것은 ‘거대한 음모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바울의 생애와 유세비우스 시대의 역사를 저자들이 마음대로 각색한 ‘웃기는 음모의 결과’이다.

    바울은 로마서 서론에서 예수를 가리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generatio) 분이며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resurectio) 분”(로마서 1장 3∼4절)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오시리스 신화처럼 가현적인(doceo) 인간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처럼 해마다 반복하여 재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단 한번 부활하신 분임을 분명히 하였다.

    서기 70년을 전후하여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 외에도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서기 76∼79년 사이에 쓴 ‘유대고대사’와 ‘유대전쟁사’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서기 55/56∼120년쯤)가 쓴 ‘연대기’에서도 유대 총독 빌라도에 의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170년께 헬라의 풍자 작가인 루시안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현자(賢者)”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부정하고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주장하는 만용에 통탄할 일이다.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며,산 자의 영적 부활(해탈)이 아니다.

    저자들은 1946년 나그 함마디에서 발굴된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을 인용하면서 예수는 고통을 겪지도,피를 흘리지도,죽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특히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 복음서’에 기록된 “먼저 죽고난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죽고 나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부활해야만 한다”는 영적 부활론을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영적 각성을 통한 영적 재생은 미스터리아 신앙의 핵심이며 득도나 해탈과 같은 선불교적 특징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동서양의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도 이러한 영적 부활론자들이 존재하여 부활신앙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을 질책하였다.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12∼13절)고 하였다. 저명한 신학자인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1979)이라는 책에서 고대 그리스의 미스터리아 신앙과 영지주의의 신관과 성서의 하나님 신관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신은 고난과 죽음을 겪지 않는 ‘무감정의 신’(God of Apathos)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하감하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난당하는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God of Pathos)이다.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시므로 그 고난과 죽음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부활신앙이 아닌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감히 신앙이라고 일컬을 수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허호익 박사 (한국교회언론위원회 학술위원,대전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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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장 11절

    한 인간의 인생이 무활동 속에서 흩어지거나, 분주한 활동 가운데 허비되지 않으려면,  그삶을 이끄는
    보다 높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



    실존적 절망...

    영원함 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원하지만, 영원하기는 커녕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하루살이? 아니
    지질학적 시간에 있어선 단 몇초에 불과할 우리의 실존..

    지금 내가 인지하는 나는 무엇인가???


    우울함이나 공허함? 정신적이거나 감상적인 무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 무의미하고 덧없는 허상이 아닐까?

    전도서에 나타는 해아래에 새것이 없고, 모든것이 일시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도달할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생각에는 인간이 도달할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믿음은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을 초연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열심으로 세상을 살아 내는 것일 거다.

    요즘 교회에서 믿고, 복받고, 천국 가라는 식의 3류 샤머니즘은  신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일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이 모든것의 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의미있다는 것은 지금의 의미보다는 다음.. 세상 밖에 있는 삶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내가 눈을 깜빡일때마다... 나는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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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패치아담스
    내가 할수 있는 것과 할수 없는것..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

    나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안해도 되는 신학적인 고민은 안하는 것이 좋다...?!  한편으론 무비판적인 맹목적 신앙은 독약일수 있다는....


    그래도...

    난 인간일 뿐이다.  내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뿐....  잡다한 생각은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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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패치아담스
    하나님2008. 9. 10. 19:34

    고통은 그렇게 나쁜것일까?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일상속에 경미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과거에 어딘가에 나는 고통때문에 어떻게든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했다.

    고통은 상황의 문제일까?

    단지 때가 좋지 않아서..  무속신앙인들이 헛튼소리로 하는 식의 액이 끼어서?

    고통은 피하고 도망쳐야 할 문제인가?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보면 알수 있다.

    인간의 안락이 신의 섭리보다 중요하고, 인간적 이성의 합리성이 신앙보다 우위에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을...

    너무 비약인거 같긴 하지만...





    유신론자인 나의 가정은..

    하나님은 고통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신 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고통속에 들어가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어떤 작용과 변화가 있는것은 사실이다.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내기를 보면 인간인 난 이해 할수 없는 부분이 많다.

    사탄에게 인간이 하나님이 주는 무언가가 아닌 하나님 인격 자체로의 관계맺음을 증명하기 위한 내기..

    하나님에 대해 오해 하고 싶지 않지만, 오해의 요소를 충분히 제공해 준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고, 나는 길어야 80년 남짓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내게는  오늘 하루의 안락과 평안과 물질적 필요의 충족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욥기의 하나님의 모습이나..  신약의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인간이 중요시 하는 소원에 대해서

    하나님은 별로 중요치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본다.

    그러한 엄청난 거리감!   내게 중요한 무언가가 하나님께는 아무런 결정적 원인이 안되는...



    나는 모든 질문이 풀릴수 없다는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게 복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과 의심은 남아있다. 진정으로 인격적 하나님이 일하시는 우주가 사실일지..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의 일부인지...  하나님께서 그 해답을 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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